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 2월의 이중주(二重奏) 입추와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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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을 넘겨 2월을 마주하면, 우리는 기묘한 경계선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1월의 매서운 추위가 여전히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그 차가운 바람 끝에는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운 물기가 어려 있습니다. 2월은 겨울이 마지막 심술을 부리는 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태동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올해 2월은 우리에게 두 번의 거대한 시작을 선물합니다. 바로 2월 4일의 입춘(立春)과 2월 17일의 설날입니다. 이 두 날은 단순한 날짜의 변경을 넘어, 계절의 순환과 인간의 삶이 다시 한번 새롭게 정렬되는 우주적이고 문화적인 변곡점입니다. 입춘, 얼어붙은 대지에 꽂히는 봄의 깃발 24절기의 첫 번째인 입춘은 '봄이 들어선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입춘 날 문을 열고 나서면 눈발이 날리거나 영하의 추위가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옛 조상들은 이를 두고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춘이 중요한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운의 변화를 포착했기 때문입니다. 동양 철학에서 입춘은 음(陰)의 기운이 극에 달해 양(陽)의 기운으로 전환되는 시점입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얼음이 녹아 물길이 트이고, 씨앗들은 껍질을 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 입춘은 한 해 농사의 길흉을 점치고 준비하는날이었습니다. 대문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글귀를 써 붙이며, 봄의 기운이 집안 가득 들어와 경사스러운 일이 넘치기를 기원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스스로에 대한 위로이자 다가올 미래에 대한 강력한 긍정의 선언이었습니다. 2월 4일 입춘을 맞이하며 우리 또한 마음의 대문에 희망의 부적을 붙여야 합니다. 아직 세상이 춥고 삭막해 보일지라도, 내면에서는 이미 봄이 시작되었음을 믿는 '선구적 희망'이 필요한 때입니다. 설날, 사...

존재의 그림자, 삶의 허무함에 대하여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존재이다. 우리는 사랑하고, 성취하고, 소유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때로는 그 모든 노력과 결과 앞에서 깊은 허무함을 느낀다.
이 허무함은 삶의 본질적인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성공의 정점에서든 절망의 나락에서든 예고 없이 찾아와 우리를 묵묵히 응시한다.
과연 삶의 허무함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이 무거운 감정 앞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철학적 통찰 속 허무의 메아리

허무함에 대한 성찰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고대 솔로몬 왕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고백처럼, 성경 전도서는 삶의 모든 부귀영화와 지혜가 결국엔 공허하다고 역설한다.
이는 모든 것이 덧없고 변한다는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모든 고통의 근원을 욕망과 집착으로 보고, 해탈을 통해 허무를 초월하려 했던 불교의 가르침은 존재의 본질적인 무상함을 통찰한다.

서양 철학에서는 19세기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전통적인 가치와 의미 체계의 붕괴를 알렸다.
이는 인간이 더 이상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할 수 없는 '의미의 부재' 시대를 예고했고,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허무함 앞에서 인간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고 보았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끝없이 바위를 굴러 올리는 시지프의 고통스러운 노동이 무의미할지라도, 그 행위 자체에 반항하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함으로써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장 폴 사르트르 또한 인간은 미리 정해진 목적 없이 던져진 존재이며, 스스로의 선택과 책임으로 삶의 의미를 채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적 고뇌와 현대인의 허무

문학은 삶의 허무함을 가장 적나라하게 포착하고 그려내는 예술 형식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독백을 통해 존재의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고뇌한다.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깊은 절망과 허무를 노래했으며, 이는 세기말적 분위기로 이어져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근대 이후 산업화와 전쟁을 겪으며 인간 소외와 절망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무력하게 방황하며 존재의 허무함을 경험한다.
T.S. 엘리엇의 '황무지'는 현대 문명의 정신적 피폐함과 의미 상실을 웅변하며, 허무로 가득 찬 현대인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다림과 무의미한 대화로 채워진 두 인물의 모습을 통해 인간 실존의 허무를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허무 속에서 피어나는 의미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풍요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풍요는 때때로 더욱 깊은 허무감을 안겨준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타인의 삶과 비교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취하려는 욕망은 끝없이 반복되는 갈증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획일화된 성공의 기준을 쫓아가지만, 막상 그 목표에 도달했을 때 찾아오는 공허감은 우리를 허무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다면 이 허무의 그림자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허무함은 단순한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삶의 유한성과 인간 존재의 한계를 자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작은 순간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발견하게 된다.
거대한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관계를 맺고, 창조하며,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허무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는 적극적인 시도이자 삶의 본질에 대한 겸손한 수용이다.

삶의 허무함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적 감정이다.
하지만 이 허무가 반드시 절망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허무함을 통해 우리는 삶의 진정한 가치와 유한한 시간 속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할지 되묻게 된다.
존재의 무상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다운 삶을 완성하는 여정일 것이다.
허무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이라는 드라마를 온전히 살아내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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