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빈 의자가 늘어갈 때 비로소 마주하는 생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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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내 은사님 세대로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이 듦'이라는 실체를 뼛속 깊이 체감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달력의 숫자가 넘어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존재를 지탱하던 거대한 방패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이제는 내가 그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맨 앞줄'에 서게 되었다는 서늘한 자각입니다.
이러한 상실감과 두려움은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철학자와 문인들이 끊임없이 탐구해 온 주제이기도 합니다.
사라진 방패, 그리고 죽음과의 거리
심리학적으로 부모와 어른들의 존재는 '죽음과 나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합니다. 어른들이 살아계실 때, 죽음은 나와는 먼, 순서상 한참 뒤에 있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떠나시는 순간, 죽음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튼튼한 막이 걷히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어빈 얄롬(Irvin D. Yalom)과 같은 실존주의 심리치료자들은 이를 '실존적 고독'과 연결 짓습니다.
우리가 의지했던 대상의 소멸은 곧 나의 유한성을 거울처럼 비추기 때문입니다.
과거 조선 시대의 예학에서도 부모의 상(喪)은 단순히 슬픔을 넘어, 자식이 온전한 독립된 주체로서 세상에 홀로 서게 되는 가혹한 통과의례였습니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는 고사성어는 효도를 다하지 못한 회한을 뜻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 이상 내가 기댈 수 있는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뿌리 뽑힌 자의 공포도 서려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 위로 아무도 없다는 것, 다음 차례는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메멘토 모리, 두려움을 넘어선 성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에서 "우리는 삶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른들의 부재를 통해 느끼는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남은 생의 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죽음을 보며 '죽음'을 생각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를 '선구적 결단(Vorlaufende Entschlossenheit)'이라 불렀습니다. 죽음을 미리 앞서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본래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떠난 자리에 남는 것은 공허함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남긴 삶의 궤적과 태도는 이제 우리의 몫이 됩니다. 어릴 적 올려다보았던 그 넓은 등은, 이제 내가 나의 후대를 위해 보여주어야 할 등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숲에서 가장 키가 컸던 나무가 쓰러지면, 그 아래 있던 작은 나무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뜨거운 햇볕과 거센 바람에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햇볕과 바람을 견뎌내야만 작은 나무는 다시 숲을 지탱하는 거목으로 자라납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세대 교체의 순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상실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채움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떠나간 어른들이 내게 주었던 사랑, 가르침, 그리고 때로는 보여주었던 인간적인 나약함까지도 모두 내 안에서 통합되어 '나'라는 사람을 완성해 갑니다.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 즉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게 된다는 예순의 경지는, 어쩌면 수많은 이별을 겪으며 생의 유한함을 받아들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함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느끼는 이 '약간의 두려움'은 삶을 더욱 진지하고 겸허하게 만드는 소금과 같습니다. 어른들이 돌아가시며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결국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가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무언의 해답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을 안고서도 묵묵히, 그리고 의연하게 우리 몫의 삶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 길을 떠난 이들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예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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